드라마 감독이 말하는, 나를 울린 한 줄
우리의 드라마는 언젠가 여기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어요. 내가 그런 것처럼요.”
한 아이가 있다. 말을 더듬는 아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는 게 고통스럽기만하고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다. 어느 날 하굣길에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강가로 간다. 물거품이 일고 굽이치다가 소용돌이치고 부딪치는 강물을 보며 아버지는 말한다.
“너는 강물처럼 말한단다.”
아버지는 아이를 바꾸려 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이 문장으로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된다. 아이는 말한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아이는 이제 자신을 해명하거나 감추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발견한다. 이 책은 한 달 전쯤 작품을 함께한 배우분이 아이에게 주라며 선물해주신 동화책, 조던 스콧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다. 아이에게 주기 전에 무슨 책인가 하고 읽었는데 아이보다도 나에게 뭔가 울림이 있었다. 너무 쉽게 ‘부족함’으로 규정짓고 미워했던 나의 모습들을 되돌아보았다. 강물이 되어 흐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바위와 부딪혀왔는지 떠올랐다. 이 문장은 그 강물 앞에 잠시 멈춰 서게 해주었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어요. 내가 그런 것처럼요.”
우리는 더듬거리고 돌아가더라도 계속 나아간다. 정답과 다르다고 자신을 갉아먹고 있던 모든 순간을 조용히 안아줘 본다.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굽이치고 부딪치고 소용돌이치며 결국 각자의 윤슬로 반짝일 것이다.
“갇혔을 때 돌파 하세요.”
철길 건널목에 붙어 있는 문구. 건널목 안에 갇혔을 때 차단기를 부수고 탈출하라는 안내문이었는데 보는 순간 울컥했다. 일에서도, 삶에서도 찾아오는 무수히 많은 고립의 순간.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나 자신에 대한 후회. 후회. 후회.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탈출하는 것이라는 명징한 결론을 아홉 글자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앞으로도 여전히 후회하고 자책하는 삶을 살겠지만 인생의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마다 한 번씩 떠오르는 말이 될 것 같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수십 번 헷갈리는 이름과 압도적인 분량에 제게 러시아 소설은 과장을 보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스무 살의 패기 덕분에 겨우 이 책을 열어볼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첫 문장을 읽었을 때, 오랫동안 찾던 해답을 마주한 것 같은 흥분과 이상한 위로와 안도가 교차하던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게 가족이란 아주 복잡하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거든요.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상처를 줄 수 있으면서도, 끝끝내 서로를 돌아보게 되는 기묘한 관계랄까요. 현실과 이야기들 속에서 체감했던 그 끈적거리는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명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이 문장을 꺼내 보게 됩니다. 이제는 오래된 습관처럼요.
“자기 내부의 나침반 같은 것이 반응해버려서 다른 길은 돌아볼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방향감각 같은 거랄까. 그래서 그런 것이 있는 사람은 헤매지 않지.”
아주 힘들 때면 늘 찾아 읽는다. 첫 대학 입시에 실패한 열아홉 살에도, 아등바등 살았던 스물다섯 살에도, 한 치 앞이 깜깜하던 조연출 시절에도 <어색해도 괜찮아> 속 저 문장과 항상 함께해왔다. 오죽하면 매년 첫 다이어리에 저 문장을 꾹꾹 눌러 담고 있을까. 오랜만에 찾아본 책 속에서 긍하는 10대의 고등학생 그대로였다. 나 혼자 훌쩍 나이 든 게 좀 억울했다. 심지어 이젠 긍하의 부모님보다도 내 나이가 많다니! 하지만 큰 눈을 반짝이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하는 긍하가 책만 펼치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마음 한편에 늘 함께하는 열여덟 살의 긍하를 믿고 앞으로도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내 안의 절대적인 방향을 믿고 가보자.
“혐오는 학습되는 것임이 분명하며, 학습을 통해서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도록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이 그 반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위 환자의 환자 가족으로서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경우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것을 원하는 등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에 관한 의사로 보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연명의료 중단 등에 관한 의사를 일관하여 표시했다는 점에 대하여 위와 같이 진술합니다.】
짧지 않은 문장을 이토록 잊지 못하는 것은 고인을 향한 그리움 때문일 겁니다. 내 손으로 이름 석 자를 적고 서명할 때, 그 손끝에 닿은 감각이 또렷합니다. 중환자실의 약품 냄새, 불규칙하게 울리는 비프음까지도요. ‘포기였을까, 존엄이었을까?’ 그림자처럼 내 뒤를 쫓는 이 질문에, 저는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을 시작하는 3월에 무거운 문장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인가 봅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내 마음에 울림을 준 문장’을 함께 적어 보냅니다.
“혐오는 학습되는 것임이 분명하며, 학습을 통해서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도록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이 그 반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혐오는 쉽고 사랑은 어려운 시대지만, 그럼에도 혐오보다는 사랑이 마음 가까이에 닿아 있으니 드라마 속 연인들, 가족들처럼(-아니, 그보다도 더 많이-) 사랑을 곁에 두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드라마를 만들 때는 주인공들을 어떻게 찢어놓을까? 어떻게 무너지게 할까? 지독하고 가혹한 시련을 주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만큼은 큰 갈등도 어떤 위기도 없이, 존엄 가까이, 시시한 멜로 드라마이기를. 다만, 해피 엔딩뿐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