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믿음의 한가운데서 만난 박정민, 박강현, 리처드 파커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의 세 주역 박정민, 박강현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모든 등장 주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믿음으로 무대를 펼친다. 마지막엔 파이의 어느 이야기를 선택할지, 믿음이야말로 삶을 구원할지 상념을 남긴다.
박강현, 고통의 동반자를 자처하다
정말이지 올 한 해 배우 박강현의 시간은 숨 가쁘게 흘렀다. 뮤지컬 <멤피스>의 휴이 역할에 이어 <알라딘>의 주역 알라딘으로 장기 공연을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뿌듯할 만한 성과였다. 그 사이 틈을 놓치지 않고 4중창 크로스오버 그룹 미라클라스의 일원으로 공연을 선보인 데다, 배우로 데뷔한 지 10년이 된 해를 기념하며 단독 콘서트까지 열어 조금 더 가까이에서 팬들과 만났다. 알뜰살뜰 시간을 썼으니, 연말에는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려나 싶었는데 웬걸. 기세를 이어받아 한층 더 ‘가열차다’. 기존 뮤지컬, 연극과 또 다른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파이 역을 맡아 3개월간의 대장정에 오른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라면 맨부커상을 받은 원작 소설 <파이 이야기>(2001)를 기반으로 이안 감독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로 만들어 호평받았고, 2019년 영국에서 라이브 온 스테이지 공연이 처음 공개되며 토니상 3관왕을 받은 정평이 난 대작 아닌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고, 도중에 배가 난파하면서 파이와 몇몇 동물, 특히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살아남아 생과 사, 믿음과 이야기에 관한 장대한 서사를 그려나간다.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동물 연기, 무대 구현 등이 연출의 관건이다.
“내가 이해한 라이브 온 스테이지 개념의 핵심은 퍼핏(동물 인형)과 퍼피티어(퍼핏을 움직이는 배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자 끌린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기존 무대와 또 다른 장르, 경계, 형식의 작품이랄까. 상대적으로 이런 작업이 많지 않다 보니 언제 또 기회가 오겠나 싶었다.”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하기. 기꺼이 낯선 길에 오르기. 도전인 만큼 사전 연습 과정이 철저해야 했다. “<알라딘> 장기 공연을 마친 바로 다음 날부터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을 시작했다. 사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어서 첫날 연습실에 가자마자 집에 가고 싶었다.(웃음)” 치열한 한 해를 돌아보는 그의 너스레였지만, 새로 임하는 작업을 허투루 하진 않는다. 9월부터 매일같이 출퇴근하듯 규칙적으로 연습실을 오가며 맹연습 중이고 “지금도 계속 연구하며 만들고 있다”며 세공에 세공을 거듭하고 있다. 마침, 인터뷰 바로 다음 날이 무대가 펼쳐지는 실제 극장으로 들어가 연습하는 첫날이다. “드디어 무대를 보는구나! 이 순간이 가장 기대된다. 그 전까지의 연습은 맨땅에서 하는 것과 같았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 내일부터다.”
연습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역시나 퍼핏과 퍼피티어와의 교감, 호흡이다. “눈앞에 있는 동물의 기질이나 성질을 잘 파악하고, 퍼피티어와 그들이 만들어가는 퍼핏의 움직임을 신뢰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의 움직임이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파커만 보일 때가 있다.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가져가고, 그런 때를 좀 더 많이 만나기 위해 합을 맞춘다. 늘 그렇듯 상호적이다. 내가 주는 에너지만큼 퍼핏도 받아야 하고, 퍼핏이 주는 에너지만큼 나도 받아야 한다.” 뮤지컬 등 무대 경험만 놓고 보자면 꽤 경험이 쌓인 박강현이지만 겸양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뮤지컬은 장면이 시작되고 음악이 나오면서 노래로 이어지잖나. 음악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음악이 관객의 마음을 이끌고 감정이나 상황을 전하는 면이 크다. 물론 이번 작품에도 음악이 흐르며 분위기를 잡아주지만,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많다. 어렵지만 그걸 만들어가는 재미가 크다.”
물론 파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파이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고 뭐든 쉽게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 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늘 ‘왜?’라는 질문부터 던진다. 또한 극한 상황에도 긍정의 힘을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릴 때 꽤 호기심 어린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파이를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파이와 파커의 관계, 그 변모를 그려가는 데 주력한다. “처음에 파이에게 파커는 그야말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파이가 사랑하는 염소를 파커가 무참히 죽였을 때, 증오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망망대해, 그 비좁은 보트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점차 둘 사이에 각자의 영역을 만들고 그것을 인정하며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공존하게 된다. 특히 아무도 없이 혼자가 됐다고 느끼는 파이에게 파커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곳에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크나큰 의지가 됐을 것이다. 동물을 진정으로 길들인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둘 사이에 익숙함과 정이 생기고 관계의 균형이 유지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통의 동반자. 나를 살게 해준 끔찍하고 사나운 존재.’ 파이가 파커를 두고 하는 극 중 대사가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돼준다는 역설, 아이러니, 그것에서 나오는 짙은 페이소스까지. 어쩌면 누구나 저마다 애증의 존재, 파이와 파커 같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배우라는 창작자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미움과 증오, 사랑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고통의 동반자’ 말이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 가끔 내 연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오늘은 비교적 나쁘지 않았다’고 여길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가야 할 길이 참 멀구나’ 하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깨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저 자신을 믿고, 또 자신과 싸우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에서 오는 힘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비단 올해뿐 아니라 박강현은 빈틈없이 매년 작품을 꾸준히 해오며 필모그래피를 성실히 쌓고 있다. “내가 생각보다 잘 못 쉬는 타입이다. 막상 두세 달 쉬라고 하면 길을 잃은 사람처럼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보낸다. 그럴 거면 ‘작품을 하자’는 생각이다. 작품을 하면 그때마다 깨닫는 게 있다. 하나씩 뭔가를 알아가는 재미도 크고 배우는 게 있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에서 숙련도가 높아지는 게 느껴지는데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낄 때 정말 기쁘다. 그것이 아마 내가 계속 일할 수 있는 동력이 아닐까.” 구체적인 배움의 내용은 작품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한눈팔지 않고 무대에 오르며 그가 얻는 가장 큰 것은 바로 “무대예술이란 무엇인가. 무대는 어떤 곳인가”에 관한 자문이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것일까 또한 감안하려고 한다. 그저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깊이감을 주는 작품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이 아닐까. 그날 처음 봤지만, 딱 한 번 봤음에도 이 작품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가 바로 이해될 때, 그러면서도 재미까지 있을 때 진정 웰메이드다. 그러려면 배우로서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달리 말하면 그것은 배우가 자신이 지금 어떤 매체와 플랫폼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일, 그에 따라 연기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고 달라질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환기와 각성의 과정이 배우 박강현을 나아감으로, 성장으로 이끈다.
“3월까지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한국 초연을 잘 올려보자는 마음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크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고 있다.” 첫 공연을 앞두고 박강현이 다시 각오를 단단히 한다. “나와 (박)정민 형, 더블 캐스팅이다 보니 누구 하나 다치면 큰일 난다. 그만큼 서로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내게는 연예인이자 늘 스크린에서 보던 정민 형과 같이할 수 있어서, 형 연기를 보며 배울 수 있어서 좋다. 나도 정민 형이 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 보러 가려 한다. 많이 보러 와주시기 바란다!(웃음)” 정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박정민, 믿고 싶은 바를 믿다
지난 11월, 박정민이 청룡영화상 시상식을 통해 ‘국민 남친’으로 등극하기 사흘 전, 그를 만났다. 서강대학교의 스튜디오에서 그가 반바지를 입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쪼그리듯 앉아 있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발가락과 어깨가 약간 말려 있었는데, 그는 괜찮다면서 동네 출판사 사장님처럼 친근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이와 상반되게 답변은 주어와 서술어가 명료하고 심지가 있었다. 녹음한 파일을 문서로 풀어도 거의 만질 게 없을 정도였다. 드문 경우다. 역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우리는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박정민은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부터 먼저 봤다. “한창 영화 공부할 때였는데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비롯해 엄청나게 들인 공에 무척 놀랐고, 덕분에 책까지 이어 읽었다. 인물의 전사와 심리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는데, 영화든 소설이든 대단한 작품이다.” 태평양 한가운데 남겨진 소년과 벵골 호랑이의 227일간의 여정이 영화로 구현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센세이션했는데, 이번엔 공연 무대다. 과연 어떻게 표현될까 솔직히 가늠되지 않았다. “그래서 안 하려고 했다.(웃음)” 박정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툭 웃음을 유발한다.
박정민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2017) 이후 무대를 두려워했다. “처음 연극할 때는 나이도 어리고 선배 형님들도 도와주시고, 초심자의 행운을 받아 재밌었지만, 행운은 점차 떨어져나가기 마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할 당시에 무대를 존중하지 않고 내 식대로 해석했다. 무대는 예전부터 누군가 늘 오르내리고 관객이 지켜본 역사가 있고, 그 안에 일정 부분 공식과 루틴이 자리하는데 그것을 멋대로 배제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대에 보복당한 것 같다.” 무대 자체를 고민하던 그는 파이의 서사에 확실히 호감이 있는 데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해외 공연 영상이 인상적이었기에 출연을 결심한다. “한정된 공간에서 <파이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과 연구가 느껴졌다. 내가 참여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나 역시 한국 공연을 보기 앞서 영상을 찾아봤는데, 소설이나 영화, 연극이나 뮤지컬과는 다른 세계였다. 제작 팀은 스스로를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왜 자꾸 연극이라고 하지 말라는지 의아했다. ‘연극이죠?’라고 물으면 연출은 ‘아니요, 라이브 온 스테이지인데요’라고 답했다.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연극과는 진행 방식이 다르다. 노래를 하지 않을 뿐 음악에 많이 맞춰야 하고, 상대 배우와 리처드 파커 같은 퍼핏과 퍼피티어들이 하나로 묶여 극을 진행한다. 배우가 ‘이 챕터는 내 거’라는 마음으로 온전히 한껏 할 수 있는 연극이 있지만, 이것은 ‘큐’ 하나에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긴밀하게 움직인다.” 한마디로 일사불란하다. 모든 등장인물이 쉼 없이 움직이고 감정을 뿜어내 틈 없이 꽉 찬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배우들이 연습 초기부터 앙상블 트레이닝에 집중한다.
박정민이 거친 오디션도 예사롭지 않다. 혼자 독백이나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퍼핏을 움직이는 퍼피티어 서너 명과 앙상블을 이뤘다. 또 한 번은 갑작스럽게 세 명의 배우와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무거나’를 내가 제일 못한다.(웃음)” 하지만 신기하게도 상황이 이어지고 그는 결국 울었다. “배우로서 재능이 없다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도, 상대가 자극과 에너지를 주면 안에서 뭔가 발생하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 아주 고요해졌다.”
파이의 주요 상대역인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호흡도 마찬가지다. 이 맹수는 공연 <워 호스> 등에서 퍼핏 연출을 해온 핀 콜드웰(Finn Caldwell)과 닉 반스(Nick Barnes)가 공동 제작했다. <보그> 촬영장에 리처드 파커를 ‘모시기’까지 나는 가이드라인과 당부를 반복해 들었다. 그는 맹수 생명체이고 절대 반려동물이나 인형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 처음엔 대형 인형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 ‘뭘 그렇게까지’ 싶었다. 드디어 촬영일. 파커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담겨 입장했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이 배를 타고 캐나다로 이주할 때 가져간 우리 같았다. 파커의 몸체는 한 번도 바닥에 눕히거나 의자에 걸쳐 있지 않고 끝날 때까지 폴대를 사용해 세워졌다. 그 옆에는 협력 퍼핏 디렉터 케이트 로우셀(Kate Rowsell)이 늘 함께했다. 그녀는 말하자면 파커의 연기 코치다. 세 명의 배우 김시영, 최은별, 이지용이 파커의 머리(Head), 몸통(Heart), 꼬리(Hind)로 들어가 움직인다. 케이트의 지침에 따라 달라지는 호랑이의 걸음걸이, 꼬리 방향, 울음소리까지 생생하다. 호랑이의 포효를 기가 막히게 내던 김시영 배우가 이렇게 말했다. “셋이 함께 호흡하면서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여야 한다. 리처드 파커 외에도 얼룩말, 오랑우탄, 쥐, 물고기 등을 연기하기에 그 디테일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케이트는 퍼핏 연기의 일곱 가지 원칙을 언급했다. 호흡(Breath), 시선과 집중(Focus), 무게감(Weight), 정지(Stillness), 리듬(Rhythm), 상상력(Imagination), 마임(Mime)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는 마법을 위한 장치”다. 그녀는 컷마다 어떤 감정의 리처드 파커를 표현하면 될지 내게 상세히 물었다. “지금 파커는 무섭지만 강한 척하는 상태인가? 아니면 파이와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중인가?”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박정민이 말했다. “신기하지 않나.”
놀랍게도 박정민은 파커와 연기할 때 한 번도 퍼피티어를 응시한 적 없다. “진정성이 있어 가능하지 않나 싶다. 호랑이와 흡사한 모양의 어떤 것이 내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내가 파이로서 이 친구와 연기를 해야 하니 다른 사람을 보고 있을 새가 없다.” 후에 나는 박정민이 파이로 선 첫 공연을 관람했다. 정말 퍼피티어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동물 자체가 움직였다. 처음엔 내가 촬영을 준비하며 세뇌당했나 싶었지만, 배우들의 진정성이 만들어낸 신기한 경험이었다. 끝나고 나오면서 ‘혹시 당신도 그랬는지’ 주변에 묻고 싶었다. 박정민은 영화와 비교해 말했다. “영화는 보여줘야 하는 걸 정확히 보여주려 한다면, 연극은 ‘풀 샷’ 가운데 관객이 무엇을 볼지 취사선택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몰입할 수 있도록 여러 요소를 세밀하게 구성했다.”
지금 박정민은 약간 긴장한 상태다. “이번 공연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고자 다들 엄청 ‘용을 쓰고’ 있다. 놀랍도록 열심히 한다. 나는 연습만으로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다들 더 잘해보겠다고 헬스까지 다닌다. 내가 망칠까 봐 책임감, 부담감이 크고 가끔은 감정적으로 뭔가 확 올라온다. 나는 진짜 감정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연습하는 과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점차 커져간다.” 무게감을 덜어낼 방법은 관객의 호응뿐이다. “때론 객석의 숨소리까지 느껴진다. 내가 베테랑이 아니다 보니 관객의 에너지가 무척 중요하고 힘을 많이 받는다.”
공연을 보고 또 놀란 점은 30대 후반의 박정민이 17세의 파이로 보인다는 것. 퍼핏 디렉터 케이트는 “파이는 소년이지만 철학적이고 현명한데, 이를 동시에 연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박정민은 현자처럼 응수했다. “사실상 철학적 사유는 소년이 한다. 어릴 때의 다양한 생각은 점차 철없다고 여겨지며, 먹고살기에 집중하고 사고의 방향이 한정된 어른이 된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도 노래하지 않았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이다.
박정민은 소년이 되기 위해 분투 중이다. “극 중 파이가 신부님께 이런 질문을 던진다. ‘신이 친절하고 선하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폭력이 있나요?’ 우리가 어릴 때 해본 고민 아닌가. 하지만 ‘점차 신은 없겠지, 신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는 거겠지’라고 판단 내린다. 나는 파이의 이 질문을 정말 궁금해하려고 했다. 소년을 연기한다고 어린 목소리를 내기보다 그 나이처럼 생각하고 호흡해야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정점은 소년의 마지막 질문일 것이다. “어느 이야기가 더 나았어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가요?” 모든 장면이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민은 이 장면을 연습하면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엔 현실과 달리 파이가 그렇게 바꿔 얘기한 거라고 여겼다. 계속 연습하고 감정을 타고 가다 보니까 이런 생각은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살아가면서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난 이렇게 믿고 싶어, 그래야 살 수 있어’ 같은.” 그는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한 사람이, 어린아이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 아주 가엾다, 슬프다.”
살면서 태평양에 호랑이와 단둘이 남을 확률은 아마 없을 거다. 하지만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재난을 맞닥뜨린다. 어떨 땐 견뎌낼 재간이 없을 만큼 가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재난을 어떤 태도로 정리할 것인가.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