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자 강헌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명리학자 강헌은 말한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기에 스스로를 거듭 읽고 바라봐야 합니다.”
∙ 강헌 | 명리학자
∙ 철공소닷컴 대표
∙ <전복과 반전의 순간>, <명리-운명을 읽다> 외 작가이자 음악평론가
새해가 되면 많은 이가 운세를 봅니다. 대표적인 게 사주팔자 풀이고요. 이 사주팔자의 개념 먼저 알고 싶어요.
사주는 태어난 해(연), 월, 일, 시를 말해요. 한 사람의 기운을 결정하는 네 개의 기둥이라고 해서 사주, 그리고 이 사주를 간지 干支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돼서 팔자예요. 이를테면 내 생년월일시를 간지로 하면 ‘임인’년, ‘계묘’월, ‘무신’일, ‘임자’시 생이에요. 이렇게 두 글자씩 총 여덟 자가 나오죠. 이를 사주팔자라고 해요.
명리학은 사주팔자를 기본 데이터로 해서 결괏값을 도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물론 풀이 과정은 복잡하겠지만 여기에도 분명 기본적인 공식은 있겠죠?
네. 그런데 먼저 이 공식에 큰 오해가 하나 있어요. 사주팔자는 음력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에요. 사주는 음력도, 양력도 아닌 ‘만세력’, 즉 ‘절기력’을 통해 보거든요. ‘만세력’에 연, 월, 일, 시를 넣어서 사주팔자의 뼈대를 세웁니다. 물론 음력 또는 양력을 받아 만세력에 대입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대부분 정확한 음력을 몰라서, 제대로 된 결괏값이 나오지 않아서 그래요. 음력에는 윤달도 끼어 있고, 평소에 쓰지 않다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날짜가 자꾸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주팔자를 살피기엔 음력보단 양력이 좋고, 양력보단 만세력이 맞죠.
이쯤 되면 사주팔자와 만세력, 이를 포괄하는 ‘명리학’이라는 학문의 근원이 궁금해집니다.
기록의 근거로만 보면, 조선 성종 때 만든 <경국대전>에 ‘사주팔자 四柱八字’라는 용어가 처음 나와요. 과거 시험의 과목 중에 ‘음양과’가 있었고 이 안에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요. 여기서 명과학은 운명과 길흉, 화복에 관한 문제를 논하는 학문으로 소개되고요. 3년에 한 번 시험이 있었고, 그때마다 두 명의 관료를 등용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를 토대로 하면 우리나라에서 명리학은 적어도 7백 년 이상 이어진 학문이라고 볼 수 있죠. 중국의 기록을 보면 더 아득합니다. 짧게 보면 1천1백 년쯤 되고, 길게 보면 1천5백 년쯤 돼요. 수나라, 당나라 때부터 기록이 남아 있거든요. 이게 지금의 명리학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한 게 송나라, 그러니까 북송 시대(960-1127)를 지나 남송 시대(1127-1279)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해요.
왜 그럴까요?
시대가 불안정해서요. 눈뜨면 전쟁을 하던 시대니까요. 송의 멸망기였으니, 나라가 얼마나 어수선했겠어요. 전쟁과 기아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당연하게도 이 ‘역학’이라는 학문이 큰 주목을 받고 힘을 가질 수밖에요. 곧 전쟁터에 잡혀나갈 사람도, 이미 나가 있는 사람도 내가 어떻게 될지, 우리 아들, 남편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니까 이때 성행했던 거죠. 문제는 이 힘이란 게 커질 수록 변질될 가능성도 같이 높아져요.
학문이 왜곡되기 시작하는군요.
네. 사람들이 많이 찾고 의지하면서 힘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점점 순수 탐구 영역에서 멀어지게 된 거죠. 이때부터 세속화, 미신화가 되기 시작했다고 봐요. 명리학, 역학이라는 본질 가치가 훼손되기 시작했죠. ‘내가 너의 미래를 알고 있고, 나는 너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어’ 이렇게 사람들의 자주성을 무너뜨리면서 지배하는, 일종의 학문적 변질이 시작됐습니다. 타락한 종교와 마찬가지로 점차 ‘신격화’, ‘신비화’됐고요. 그러면서 이제 점점 음지로, 음지로 들어가게 된 거죠. 저는 이런 변질된 형태를 ‘골방 명리학’이라고 말해요. 오늘날도 ‘골방 명리학자’가 굉장히 많죠. 학문이라면 광장으로 나와야 하는데 말이죠. 나와서 마주하고 나누며 주고받아야 해요.
오늘날 명리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이쯤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예로 들면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모두 학문의 뿌리가 같습니다. 음양오행에서 출발해요. 한의학도 마찬가지인데, 한의학은 1970년대 대학에 학과가 개설되면서 학문으로 인정받았어요. 하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사주와 풍수, 그러니까 당대의 천문, 지리, 명과학은 점점 사라졌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명리학의 해석을 확언, 예언의 영역에서 기대합니다. 나아가서는 점술의 영역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명리학은 예측의 도구가 아닙니다. 내일, 내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히는 학문이 아니에요.
하지만 대부분은 사주팔자를 운명으로 이해하고, 이 운명은 정해져 있으므로 나의 인생도 이 정해진 흐름대로 흘러간다고들 말해요.
오독입니다. 명리학은 인간의 삶은 계속 변화한다는 그 변화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천변만화 千變萬化하는 우주처럼 인간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명리학은 사주팔자를 토대로 삶의 궤를 봅니다. 이 궤라는 건 늘 움직이고 변화해요. 우리는 이 변화를 읽는 거죠.
왜 이런 오독이 일반화되었을까요?
과거의 영향이 큽니다. 가까운 조선시대로만 가보더라도 당대는 엄격한 신분제였죠. 당시 권력층은 명리학을 신분 계급과 체제를 지키는 데 이용했을 거예요. 그래서 ‘운명’이라는 해석을 숙명론, 피해갈 수 없는 결정론으로 왜곡했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두 한자어만 봐도 균형을 이루고 있죠. 움직일 운, 목숨 명. 운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명은 주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간의 목숨은 한정되어 있어요. 모두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살아가죠. 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주어진 명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 다른 가치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명리학의 기조입니다.
그럼 명리학은 결국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나요?
판단을 돕는 레퍼런스의 역할이죠. 명리학은 절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혹 누군가가 사주팔자를 근거로 해서 “절대 이것 하지 마시라”, “너는 이렇게 될 거니까 이걸 해야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무시하세요. 그건 사기예요. 명리학의 해석은 중요한 순간의 사유 앞에서, 그 결정을 돕는 하나의 의견일 뿐이에요.
명리학은 억울할 것 같습니다. 오해가 꽤나 많은 것 같아요.
네, 역사적으로 봐도 명리학은 힘을 가질 때마다 변질됐어요. 학문이 권력화, 정치화되면서 신비주의로 변해버렸죠. 학습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소수만이 알 수 있고, 알릴 수 있는 특권으로 포장되면서 왜곡은 더 심해졌어요. 종교가 타락하는 과정과 아주 비슷합니다. 분명한 건 명리학과 종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무속과도 아무 관계가 없고요.
그런데 몇몇 무당이나 승려는 사주팔자를 보기도 하죠.
명리학은 학문이어서 누구든 학습하면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요. 음향오행이라는 명확한 균형 안에서 만세력으로 사주팔자를 세우고, 풀이하는, 일정한 이론이 체계화되어 있는 분야에요. 이것을 탐구하고 배울 가치가 있다면 우린 이걸 학문이나 지식이라고 합니다. 저는 무속 신앙을 불신하는 사람이 아녜요. 오히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흥미로워하죠. 그들은 스스로를 특정하다고 말해요. 신이 내게 순간적으로 개입해서 정보를 전달하고 간다고요. 이 정보는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무형의 신이 들어와서 알려준다고요. 그럼 사주팔자의 풀이가 왜 필요할까요? 주체의 정보가 왜 필요할까요? 신의 영역인데 인간의 영역인 학문적 메커니즘이 왜 필요하죠? 신점은 신점으로만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또 승려의 경우는 역사적 견해가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지배계급이었던 승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위치가 변하죠. 억불정책으로요. 그러면서 산으로 깊이, 깊이 들어갑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선에 목적을 둔 승려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승려도 있었겠죠. 탁발의 대가로 사주팔자의 풀이를 봐줬던 것이 지금의 오해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뜻으로 귀의하셔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스님들이 사주팔자를 봐주며 경제 활동을 하진 않으시죠. 몇몇 잘못된 장면이 그릇된 인식들을 만들어내는 거죠. 이건 순수 무속에도, 종교에도, 명리학에도 큰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의 영역에서 정보를 참고하는 태도로 명리학을 대하는 것이 맞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지금의 명리학이 잡설이나 주관적 예언, 미신으로 전락한 데는 아까 말한 ‘골방 명리학자’의 탓이 큽니다. 명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고, 개론의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풀이해 직언하는 사람들이 대분이라서 그래요. 아까 명리학의 기조는 음향오행의 커다란 틀 안에서 변화를 목격하고 발견하는 학문이라고 설명 드렸는데요, 변화는 저 혼자 일어나지 않죠. 그래서 명리학자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명리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 이해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죠.
명리학을 올바르게 소화하려면 결국 이해부터 필요하겠습니다.
맞아요. 명리학은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학문이에요. 나와 생애의 관계, 나와 부모, 자식과의 관계, 나와 행운, 불행의 관계를 찾고 해석하는 학문이죠. 찾아서 조화로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답이 나와 있듯이 말하는 사람은 네, 의심해야 됩니다.
끝으로 명리학을 접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명리학은 살아갈 길을 알려주는 예언적 영역이 절대 아니에요.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치 않거든요. 복잡하고 예측 불가한 것이 삶이기에 우린 매순간 바른 선택을 거듭하며 행복을 추구하죠. 명리학은 그런 과정 안에서 때때로 살펴보는 참고서와 같습니다. 누군가의 주문이 아닌,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인 것이죠. 타인에게 함몰되거나 기대지 않고 나로서 존재할 때 건강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