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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연애소설] 천선란의 ‘비효율 마음’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비효율 마음

Pexels

마레트는 어쩐지 미안한 얼굴로 청첩장을 내밀었다. 좋은 소식을 두고 저런 얼굴을 할 이유는 없지 않나. 우리가 청첩장을 주고받는 데 눈치를 봐야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연락이 몇 년 두절되었다가 보는 것도 아닌데. 물론 무의미한 말과 웃긴 영상들을 서로에게 보내주며 웃어대는 긴밀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마레트와 나는 분기마다 서로의 안부를 빠지지 않고 물었고 마레트가 누군가와 오랫동안 연애한다는 사실도, 머지않아 결혼하게 될 거라는 분위기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은 가까운 사이였다. 몇 년 만에 만난 마레트에게서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파트너의 공명 호르몬 ‘에르(Ehr)’의 향이 더 농도 짙게 묻어 있었다. 완전한 공명이었다. 서로의 숨과 체온, 기(氣)가 촘촘하게 엉켜 서로를 완전히 결속한 상태였다.

어서 청첩장을 열어보라 눈짓하고 마레트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동봉된 봉투를 열었다. 웨딩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마레트의 파트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혼기가 가득 찬 덕에 푸르스름하던 피부가 잘 익은 자두처럼 자줏빛으로 탐스럽게 변해 있었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시하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이, 혹은 그런 존재라는 것에 부러운 마음이 들어 하염없이 바라본 후에야 마레트가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했다.

“오고 싶으면 왕복 티켓이랑 숙박료도 전부 지원해줄 수 있는데, 가족을 빼고는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다들 마음은 굴뚝같은데 아무래도 이동 시간 때문에 두 달 가까이 시간을 써야 하니까. 시간이 문제지, 시간이···”

예식장이 지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레트의 파트너가 여전히 부족사회 출신이고 식에 방문하는 인원도 많을뿐더러 마레트도 그들과 공명의 의식을 치러야 했기에 그곳에서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럼 두 달 뒤에 와?”

내가 물었을 때, 마레트는 이번에도 청첩장을 건넬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우리는 그전에도 디지털로 소통하며 몇 년에 한 번씩만 얼굴을 보던 사이였으니 마레트가 지구를 떠난다고 할지라도 변할 것은 없었는데도 떠난다는 사실 하나에 마음이 순식간에 헛헛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구나, 그게 효율적이지. 거기는 날씨가 내내 따뜻하고 좋다며. 부럽다.”

마레트는 그 말에 숨은 진심을 헤아려볼 생각이 아예 없다는 듯, 곧장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웃으며 남은 차를 마셨다. 그리고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아직도 인간 만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레트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간끼리는 사랑의 확신을 어떻게 하니?”

집에 돌아왔을 때 석은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맡아지는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달갑지 않았다. 석은 같이 먹을 때만 요리했다. 분명 청첩장 모임이 있으니 저녁을 먹고 온다고 말했는데 그걸 잊고 2인분의 저녁을 차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깥의 찬 기운을 느꼈는지 내가 부르기도 전에 석이 돌아보았다. 내 손에 들린 디저트 상자를 보더니 그제야 내 말이 떠올랐는지 웃고 있던 얼굴에 낭패감이 내려앉았다. 배가 고픈 척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먹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고 대신 저녁을 조금 먹어 출출하다고 대답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반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석의 표정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조금만 먹겠다는 나의 말과 달리 석이 한 들기름 국수는 조금 전 비싼 레스토랑에서 먹은 파스타보다 훨씬 맛있어서 나는 결국 1인의 몫을 다 먹었고, 내가 사온 티라미수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배에 거지가 들었나”라고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티라미수의 코코아 가루를 입술에 묻힌 석이 실실 웃으며 입을 맞춰왔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남긴 코코아 가루는 씁쓸했고, 석은 좋아한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되풀이했다. 틀지 않은 TV 액정에 비친 우리의 겉모습은 놀랍도록 똑같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석의 피부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마레트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사랑해도 신체의 변화가 없잖아. 아주 미세하고, 시간이 지나면 무감각해지고. 영원한 짝을 알아본 순간 신체가 변화하는 다른 행성의 종족들과 너무 비교돼. 그래서 인간끼리의 사랑은 영 믿을 수가 없지 않니? 불안하고, 불완전해. 의심이 끝이 없고, 속단하고, 절망하고···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지난 역사와 숱한 사례가 말해주잖아. 그런데도 인간과 사랑하고 있는 네 마음이 궁금해.”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마레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써서 보냈다.

맞아, 마레트. 인간끼리의 연애는 불안하고 불완전해. 그 마음을 영원히 알 수가 없지. 그래서 끝없이 서로의 마음을 증명해야만 해. 드러나지 않으니까 말과 행동으로, 평생. 얼마나 비효율 마음이니. 나도 이 비효율의 마음을 더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 그만둘 거야. 그러니까 코코아의 쓴맛이 싫어질 때, 배가 고파도 함께 저녁을 먹지 않을 때··· 근데 15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그런 행위들이 싫지 않아. 참, 신기하지 않니? VK

천선란 은 대표작 <천 개의 파랑>으로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무너진 다리>로 2020년 SF어워드 장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며 SF 장르계의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이 외에도 <나인> <노랜드> <랑과 나의 사막> <이끼숲> 등을 썼고, 2024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다양한 앤솔러지와 매거진에 기고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연작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를 출간했다.

“우리 연애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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