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지고 작아지는 즐거운 혼돈 속으로, 알마 펠트핸들러
알마 펠트핸들러의 그림은 사라지는 세계의 멜랑콜리를 상기시킵니다. 작가의 작업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는 시공간을 사뿐히 넘나들어 천연덕스럽게 한 장면에 공존합니다. 패션 매거진 속 화보에서 한 번쯤 본 듯한 발렌시아가나 미우미우의 패턴도 있고, 100여 년 전 에드워드 시대의 양복을 입은 이들도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이든, 대상이든 그들을 둘러싼 시간의 층위를 거두어냄으로써 낯설고도 익숙한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사라지는 듯한 그 기이한 세계에, 1996년생인 젊은 여성 작가는 당당히 ‘가장 최신의 것’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이 제목은 우리를 단박에 유혹하는 마법의 주문인 동시에 작가의 작업 세계를 반의적으로 보여주는 단서가 됩니다.
이번 전시는 마이어리거와 갤러리 조슬린울프가 의기투합해 서울에 문을 연 갤러리 마이어리거울프에서 3월 26일까지 펼쳐집니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아니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 공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작품의 크기인데요. 펠트핸들러의 작품은 유난히 자그마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크고자 욕망하지 않는 거죠. 그럴듯한 프레임에 기대지도 않기에, 그림들은 한없이 가벼워 보입니다. 가로 약 10cm, 세로 약 20cm의 그림들이 자유롭게 턱턱 붙어 있고, 내려오는 계단을 마주한 벽 상단에 걸린 몇 점의 그림은 관람객의 머리 위에서 부유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들 그림은 회화로서의 존재감을 내세우며 미술의 영역에 편입하는 대신 차라리 일상의 순간에 머물기를 택한 것 같습니다.
펠트핸들러는 아카이브 사진을 주된 이미지로 가져오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디아스포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패션사 등을 두루 참조하는데요. 예로부터 패션은 사회적 규범 및 정체성을 설명하거나 과시하는 데 활용됐죠. 하지만 펠트핸들러의 작품에서 패션은 풍성한 스커트 혹은 슬립 드레스를 입고, 앞코가 뾰족한 로퍼를 신은 주인공들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장치가 되어줍니다. 더군다나 작가의 붓질은 몽환적이고, 색감은 고전적입니다. 영화 속 한 장면보다는 문학의 한 페이지 같은 거죠. 혹은 마치 외할머니의 다락에서 발견한 수십 년 전 그림 같다고나 할까요. 이들은 과연 어떤 세상에서 왔을까요. 어떤 세계에 머물고 있을까요. 펠트핸들러의 그림은 익숙한 선형적 시간성에 균열을 내고, 영악할 정도의 포커페이스로 우리를 즐거운 혼돈으로 밀어 넣습니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매력은 보는 이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라 여겨온 저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만난, 순수하게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입니다. 작은 그림일수록 몰두하게 만드는 힘은 더 강력할 수 있고, 그 상상의 영역은 더욱 넓고 깊을 수 있습니다. 작은 그림 옆에 자리한 흰 벽으로, 붉은색 스커트를 입고 쇼트커트를 한 여성이 자박자박 걸어 나오는 것 같더군요. 작품 속 인물들은 일견 한없이 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없이 생생합니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이 그림들이 어떤 미술 사조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따져 묻지 않아도 될 겁니다. 현대성과 고전성 사이에 ‘가장 최신의 것’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