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포토 스튜디오 #3 가장 보통의 여성 17인
누군가의 엄마로, 딸로, 아내로 살아가며, 또 직업과 역할로 부름받으며, 우린 존재 그 자체로 특별하다는 사실을 간혹 잊는다.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세상은 움직인다. 커버 화보와 전시, 토크 행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을 응원하고 지지해온 ‘보그 리더’ 세 번째 이벤트를 기념하는 3월의 ‘보그 포토 스튜디오’에 가장 보통의 여성을 초대한 이유다. 덕분에 <보그> 메일함에 오랜만에 사연 수백 통이 쏟아졌다. 언스쿨링 중인 여중생, 고 3, 한 부모 가정의 세 모녀, 교민과 외국인, 장애인 바리스타, 공예가와 스턴트우먼 그리고 100세 할머니까지,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수상자이자 피사체의 의미와 이면을 예리하게 관조하는 사진가 정희승이 그중 17인의 얼굴을 포착했다. 자기소개가 영 쑥스럽다던 17인의 여성이 반가운 스포트라이트 안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낸다.
김별, 15세
“언스쿨링(아이 스스로 관심과 흥미를 추구하며 자유롭게 배우는 교육 방식)을 하고 있는 2012년생 김별입니다. 저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태권도, 피아노, 게임, 영상 편집… 하루를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우죠. (엄마 아빠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감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고민이랄까요. 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유로운 탐험가’입니다. 궁금한 건 못 참고, 일단 해보거든요. 극‘I’형이라 보그 포토 스튜디오 촬영을 앞두고 정말 떨렸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생애 가장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아직 완벽하게 잘하는 건 없지만 <보그> 촬영처럼 뭐든 행복하게 도전하고 싶어요. 천천히, 하나씩요!”
최양순, 100세
“1927년 인천에서 태어난 최양순입니다. 한국 나이로 올해 100세가 된, 김포시 월곶면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할머니예요. 100년을 살아온 제 모습이 사진으로 기록된다는 게 신기하면서 고맙습니다. 특별한 모습보다는 지나온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남은 얼굴과 태도가 담기면 좋겠군요. 저에게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기억은 시어머니와 함께 보낸 젊은 날입니다. 시어머니께서 말씀은 많지 않으셨는데 살림하는 법부터 사람을 대하는 마음까지 행동으로 따뜻하게 일러주셨어요. 함께 부엌에서 보낸 시간, 집안일을 마치고 나란히 앉아 쉬던 순간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그 시절을 지나며 사람은 말보다 삶으로 가르친다는 걸 배웠지요. 농사짓고, 인삼을 키우고, 한과를 만들며 앞만 보고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보내고 힘든 날도 많았지만, 일곱 아들을 키우며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잘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잘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상 하나 줄 이유는 충분하겠지요.”
카플레 사라, 16세
“백운중학교 3학년 카플레 사라(Kafle Sarah)입니다. 목사이자 자상한 성격의 네팔인 아버지와 현명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조용하지만 따뜻한 오빠도 한 명 있죠. 가족 소개가 상세하다고요? 그만큼 가족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이번 보그 포토 스튜디오 촬영에서는 축구 유니폼을 입었어요. 하루 중 대부분은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운동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뛰고, 땀 흘리고, 공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야구를 보거나 친구들과 축구 하는 시간이 저에겐 가장 큰 힐링이랍니다. 아직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잘 모르지만,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으로, <보그>에 제 얼굴과 이야기가 담긴다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최도연, 43세
“저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요. 최도연, 1982년생, 마흔세 살입니다. 15년 동안 기업 교육 강사로 일했고, 2019년에 프리랜서가 되었어요. 그러다 지난 연말, 또 한 번 전환을 결심했죠.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에 도전했거든요. 덕분에 올해는 활력이 넘칩니다. 기업 교육 강사와 조종사 교육생으로서, 그리고 파일럿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우주항공 리더 조찬 포럼에 참석하며 서로 다른 세계를 바쁘게 오가고 있거든요. 감정 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한 것 같아 만족스러운 요즘입니다. 어릴 땐 다정한 아빠를 가진 친구들이 참 부러웠는데, 이제야 저도 아버지의 장점을 발견합니다. 요즘 삶의 이슈는 제 선택을 믿는 거예요.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1년 만에 팬데믹이 찾아왔고, 강의는 전부 취소되어 수입이 ‘제로’인 적이 있었어요. 항공업계도 큰 타격을 받아 아버지의 직장 생활도 어려워졌죠. 끝이 아니었어요. 2022년 울진 산불로 부모님 집이 전소되었고, 막막한 현실 앞에서 엉엉 울어버린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이미 다 잃었는데 뭐가 더 무섭니. 이제 다시 일어설 일만 남았지.’ 그 말이 정말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제는 잘 알아요.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정답은 없다고요. 지금부터는 저만의 답을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신소용, 31세
“넘어지고, 부딪히고, 다시 일어나는 게 일상인 배우이자 스턴트우먼 신소용입니다. 공연예술학과를 졸업했고, 어릴 때부터 수련해온 태권도 실력을 지금은 촬영 현장에서 액션 연기를 펼치는 데 쓰고 있죠. 발 차기를 하고, 거침없이 몸을 던지고, 누구보다 바닥에 먼저 닿는 역할을 자처하며 거친 액션 현장에서 강인함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배우의 꿈을 품고 있죠. 배우로서는 천진한 에너지와 투명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롤모델인 틸다 스윈튼처럼요. 한 가지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요. 저도 그녀처럼 자신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고, 순간순간 솔직한 선택을 이어가며 계속 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번에 촬영한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세상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믿고 움직이자고 되뇌던 오늘의 용기를 되새길 거예요.”
신미선, 44세 & 신아인, 14세 & 신아나, 12세
“안녕하세요. 신미선, 신아인, 신아나 모녀입니다. 우리는 창신모자원에서 지내며 자립을 준비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게 걱정도 됐지만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그리고 둘째 아나의 꿈이 모델이거든요. 언니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크죠. 두 딸과 함께 웃고, 긴장하고, 사진 속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충분히 의미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날 문득 ‘걱정 없이 마음껏 꿈꾸고 싶다’고 말한 것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거든요. 아이들이 자기만의 길을 찾을 때까지 저는 엄마로서 힘닿는 데까지 서포트할 계획이에요. 연예인 매니저처럼요! 한 부모가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제 선택이 아이들에게 더 건강한 정체성과 단단한 뿌리로 자리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가족은 아직 ‘준비 중’이지만,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김진우, 47세
“요르단 암만에서 보그 포토 스튜디오에 사연을 보냅니다. 주요르단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문화 교육 업무를 맡고 있는 김진우입니다. 대사관에서 일한 지는 16년째예요. 정무 경제로 시작해 여러 직무를 거쳐왔지만, 외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는 지금 하는 일이 가장 나답게 느껴집니다. 해외에서 오래 거주한 주변 사람들은 한국이 답답하다고 하던데, 저는 어쩐지 갈수록 한국이 더 그리워요. 휴가는 꼭 한국에서 보내고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주변국에 비해 분위기가 개방적인 편이지만, 이슬람 문화권의 아랍 국가에서 외국인 싱글 여성으로 살아가려면 많은 것이 조심스러워요. 홀로 마음껏 바깥을 활보할 수 있는 한국에 가면 요르단에서 느낀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죠.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거나 한국에서 살고 싶은 모든 여성을 초대한다’는 보그 포토 스튜디오 공고문을 보자마자 ‘이건 나를 위한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참여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촬영할 때 입고 싶은 요르단 전통 의상도 직접 샀죠. 앞으로 어디서 살아가야 할지를 비롯해 여전히 고민은 많지만, 이번 촬영이 제 삶의 다음 챕터를 열어주길 기대합니다.”
임소리, 26세
“제가 꿈꾸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진 못하지만, 그런 과정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임소리입니다. 전주에서 살고 있고요.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는데 언젠가 제 방식대로 논밭을 일구겠다는 진지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그 꿈을 향해 전진 중인 지금은 카페에서 일하고 있고요.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에는 늘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콘센트가 있고, 창문이 보이는 자리를 선호하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있지만,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책 속에서 여자로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다시 농업을 선택할 사람으로서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통과할지를 배우죠. 지금 제 삶의 만족도를 표현하면 97% 정도예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방향을 재정비할 수 있는 지금이 충분히 좋습니다. 남은 3%는 미래를 위해 아껴두려고요.”
박효진, 29세
“화학 회사 OCI에서 운영하는 사회적 레스토랑 겸 카페 콜리그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는 박효진입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근무하고요. 중증 발달장애인이라 행동은 조금 느리지만, 대신 끝까지 배우는 사람입니다. 한번 배우면 누구보다 성실하게 반복하죠. 그래서인지 커피를 내리는 일이 저와 잘 맞습니다. 특히 라테에 하트를 그려 넣을 때가 설레요. 콜리그에서 라테 아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뿐이라 책임감이 더 막중하죠. 살아오면서 세상이 저를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도 많았지만 끝까지 손을 잡아준 엄마에게 고마워요. <보그> 잡지가 나오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보여주려고요. 양악 수술을 앞두고 교정 중이라 카메라를 가까이 바라보기 조금 쑥스러웠는데 지금 모습을 남기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어떤가요? 이 모습도 충분히 괜찮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가예 디아리아투, 24세
“세네갈에서 온 가예 디아리아투(Gaye Diariatou)입니다. 스물네 살이에요. 6개월 전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수출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풀타임 직장 생활은 처음이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그 전에는 한국 초·중학교에서 다문화 수업을 했죠. 아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슈의 미용실’이라는 게임을 통해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게임 속에 등장하는 한국어가 궁금했고,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죠. 그러다 스물한 살에 홀로 한국에 왔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도전이자 성장을 의미해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저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더 성숙해졌다고 느낍니다. 취업 걱정에 불안한 마음도 들지만, 과거에 비해 더 현실적이고 단단한 지금의 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취업 전 저에게 다문화 수업을 듣던 한 초등학생이 보여준 노트에 ‘나중에 세네갈에 가보고 싶어요. 더 알고 싶어요’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멈춰 있다고 느끼는 순간도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아님을 깨달았죠. 늘 경쟁할 필요는 없다고, 앞으로도 꿈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보그 포토 스튜디오에 편지를 보냅니다.”
김예지, 32세
“안녕하세요. 천연 수세미를 주재료로 작업하는 공예가 김예지입니다. 자연의 질감과 손의 감각을 바탕으로 수세미의 쓰임과 조형의 경계를 탐구하고 있죠. 최근에는 배렴가옥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실 생활에 적응하는 중이에요. 외부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다 보니 정말 많은 사람을 마주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오히려 작업에 대한 집중력이 길러지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듭니다. 이런 환경이 어떤 작업으로 이어질지 기대되기도 하고요. 작업에 더 몰입하기로 결심한 시점에 스스로에게 또 다른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자 보그 포토 스튜디오의 문을 두드립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조용하지만 단단한 성향이 사진에 담겼으면 좋겠어요. 여러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저에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조승혜, 19세
“양서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승혜입니다. 해외 생활과 세 번의 전학 등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일찍이 독립적인 시간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댄스부와 학생회 활동에도 최선을 다했죠. 그렇게 일찍부터 자신을 탐구해온 제가 어느덧 고 3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수능을 앞둔 한국의 모든 입시생이 그렇듯, 요즘은 독서실과 집을 오가는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다행히 방학 동안에는 기숙사를 벗어나 가족과 지냈는데, 그 시간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됐죠. 보그 포토 스튜디오는 스스로에게 응원을 건네고, 저 또한 응원을 받기 위해 응모 마지막 날 용기 내어 지원했습니다. 요즘 저답지 않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다 불안감을 더 자주 느끼거든요. 입시의 압박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제 사진을 보고 오랜만에 고 3 시절을 떠올릴 텐데요. 정말 부럽습니다.(웃음) 부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훗날 즐거운 마음으로 이 사진을 다시 꺼내 볼 수 있길 기원해주세요.”
장순자, 83세 & 박연희, 57세 & 박진희, 51세
“1944년생, 장순자입니다. 한평생 집에서 살림하며 살았죠.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내 할 일 해온 사람입니다. 결혼 후 시어머니와 시할머니, 시할아버지까지 모셨죠. 그렇게 50년 넘게 시댁 어른을 봉양했어요. 남편이 먼저 저세상에 간 뒤에도 치매에 걸린 100세 시어머니를 집에서 끝까지 모셨습니다. 요양원은 싫다고 하셔서요. 하지만 그게 제 역할이다 싶었어요.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좀 쉬어도 되겠지 했는데, 이번엔 제가 아프더라고요. 무서웠습니다. 췌장암이라고 해서 수술도 하고,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혈당 체크하는 게 요즘 제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몸 챙기는 게 1순위가 됐군요.(웃음) 일상의 가장 큰 낙은 과일을 먹는 거예요. 혈당 관리 때문에 애들이 많이 못 먹게 하지만, 한 조각 먹는 것만으로 기분이 참 좋아집니다. 목욕하고 나와 느끼는 개운함도 소중하고요. 우리 딸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보그 포토 스튜디오에 대해 알게 됐는데, 예쁜 모습으로 찍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딸들이랑 귀염둥이 강아지 타니도 예쁘게 찍어주세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니까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