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 가장 가까운 향기

작열하는 태양과 산들바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여유.
크리스틴 나이젤이 바라본 그리스, 그 정지된 시간의 달콤함과 평온함 그리고 향긋함.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번 자르뎅 컬렉션은 제가 20여 년 전에 떠난 여행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죠. 제 첫 그리스 여행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죠. 그러던 중 키티라섬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시각과 후각의 엄청난 감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배를 정박하자마자, 먼바다에서부터 보이던 올리브나무를 향해 곧장 걸어갔어요. 올리브나무 아래에서는 황금빛 풀이 머리칼처럼 흩날리고 있었죠. 그 풍경이 선사하는 감각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러지고, 올리브나무 아래에서는 기분 좋은 고요함과 그로 인한 안정감이 느껴졌죠. 그리고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왔는데, 그 바람을 타고 아주 놀라운 향이 느껴졌습니다. 바로 마른 풀 내음이었죠. 저는 그제야 발아래서 부드럽게 흔들리던 금빛 물결에서 아주 포근하면서도 매력적인 향기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무언가에 감명받았을 때 늘 그러하듯, 크리스틴 나이젤(Christine Nagel)은 이 추억을 머릿속에 간직했다. “제가 가진 추억의 서랍장에 고이 넣어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꺼내보려 했죠.”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에르메스가 크리스틴에게 “이제 새로운 자르뎅 컬렉션을 창작할 때야”라고 말했을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즉시 그리스 정원이 떠올랐고, 깊이 간직했던 추억이 물밀듯 몰려왔다.

에르메스 조향사들은 자르뎅 향수를 창작할 때 지키는 전통이 있다. 조향사가 정원에 직접 찾아가 영감을 얻고, 그곳에 머물며 정원의 영혼을 담은 향수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스 여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격리가 시작됐고,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그리스 정원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려 했지만, 이내 크리스틴은 자문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향수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화가가 풍경화를 그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직접 밖으로 나가 실제 풍경을 바라보며 작업할 수도 있고, 풍경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후 화실로 돌아와 기억 속에 담긴 풍경을 그려낼 수도 있다. 만약 두 번째 방식으로 풍경화를 그리면, 직접 보고 그리는 것보다는 조금 덜 정확할 것이다. 실제와 약간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그림에는 화가의 영혼 한 조각을 담을 수 있다. 크리스틴이 작업을 시작할 당시 그리스 여행이 불가했기에 두 번째 방식을 통해 파리 팡탱(Pantin)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리스 정원을 창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향수를 만드는 내내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밖에서 지낸다는 느낌이 들었죠. 아주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그녀답게 원료 선정에도 어려운 길을 택했다. “제가 고른 원료 모두 자연 추출물이 존재하지 않아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을 재창조해야 했어요.” 그 첫 번째가 올리브나무였다. “올리브 줄기를 좋아합니다. 굵고 구불구불한 줄기가 보여주는 거친 겉모습과 달리, 아주 우아하고 섬세한 향을 내뿜는 것이 매력이죠. 행사장에 가시면 올리브나무로 만든 작은 숟가락이 있는데요, 그 숟가락을 살짝 긁어서 향을 맡아보세요. 아주 세련된 우디 향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올리브나무로 향수의 중심을 잡고, 그 위에 금발처럼 흩날리는 풀의 향취를 더할 차례.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포근한 느낌과 곡식 내음을 새로이 구현했다. 이렇듯 향수의 중심을 잡고 금빛 물결까지 표현했지만 향수에서는 무엇보다 생동감과 관능미, 따뜻한 감성이 느껴져야 하는 법. “이를 위해 부드러운 질감이 더 필요했는데 그 무렵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알렉시 뒤마가 그리스에 다녀오며 제게 준 선물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신선한 피스타치오였죠.”

크리스틴은 신선한 피스타치오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 “견과류 특유의 고소한 향이라기보다는 고유의 부드러운 질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주 폭신하면서도 수분을 가득 머금은 상태였죠.” 호기심 가득한 내 눈을 본 걸까? 밤새 피스타치오를 물에 담가놓고, 다음 날 한번 만져보라고 크리스틴이 귀띔했다.

자르뎅 컬렉션의 신작 ‘운 자르뎅 아 시테르(Un Jardin à Cythère)’의 백미는 청량함이다. 향기를 싣고 날아오는 바람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이 과정이 없었다면 볏과 식물이 주는 곡식 내음을 담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번 제품은 올해 에르메스가 선정한 주제 ‘놀라움’과도 부합한다. “꽃도, 푸른 풀도 없는 금빛 정원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을까요?”

네모반듯한 상자를 장식한 삽화는 아티스트 엘리아스 카푸로스(Elias Kafouros)의 작품이다. 작업 전, 크리스틴은 엘리아스에게 그리스 여행을 하며 배를 타고 키티라섬에 도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 엘리아스가 작업한 삽화를 보여주었는데, 그 속에는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풍경이 담겨 있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죠.”

에르메스와 크리스틴 나이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이번 자르뎅 컬렉션의 향을 맡고 향수를 뿌릴 때, 이 향수를 창작하며 느꼈던 기쁨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다. 지난 3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보그>와 크리스틴 나이젤이 만났다. 예술과 자연, 에르메스 퍼퓸, 새 자르뎅 컬렉션 ‘운 자르뎅 아 시테르’에 관한 진실 혹은 대담.

이번 향수의 컨셉은 무엇이었나요?
시작은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이 일상을 뒤흔들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예상치 못한 무엇인가, 독특하고 특이한 것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도록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할 것. 그래서 에르메스는 다른 세상인 듯한 이곳, 그리스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이는 곧 창조적인 여정과 창조 그 자체가 이번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꽃과 수액이 깃든 식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마른 정원, 비나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번성하는 정원이라는 대안적 행보를 택함으로써 소비자에게 놀라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컬렉션의 영감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면?
장소에 깃든 영혼, 조향사의 영감, 에르메스 정신의 조우. 이 세 가지가 이번 컬렉션에서 모든 창조물의 초석입니다. 에르메스 하우스가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 즉 자연과 문화, 실제와 상상 사이의 이야기를 전하죠.

과정은 순탄했나요?
코로나19가 대유행 중이었기에 그 배경이 다소 이례적이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해준 그리스 여행 기간을 포함해 약 2년에 걸쳐 제작이 이뤄졌죠.

자르뎅 컬렉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자르뎅 컬렉션은 창작 이상의 희열을 선사합니다. 2019년 ‘운 자르뎅 수르 라 라군’ 출시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이번 작품은 자유와 자연이 깃든 장소, 웰빙과 발견의 세계 등 다양한 유형의 정원으로 여러분을 안내하죠. 무한에 가까운 영감의 원천과 같아요.

키티라섬으로 떠난 여행의 기억을 공유해줄 수 있나요?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감정을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래전 키티라섬에서였습니다.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하나의 이미지, 작열하는 태양이 눈부신 햇살 속 맑은 하늘의 강렬함이 먼저 떠올라요. 그 아래 역사가 깃든 깊고 푸른 바다로 기울어지듯 늘어진 채 야생초로 둘러싸여 햇볕에 흠뻑 젖은 상태로 서 있는 올리브나무 가득한 들판의 모습이었죠. 그리스에 대한 이런 비전은 특히 바다를 통해 섬에 도착했을 때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했고,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당신이 느끼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지녔나요?
일반화를 선호하지 않지만 그리스인 대부분이 따뜻하고 인간 친화형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땅, 문화,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고, 상당히 근거 있는 이유로 강한 애국심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며, 그들의 나라를 공유하는 것을 즐기죠.

예술에 필요한 도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도시는 예술 창작의 교두보 역할을 합니다. 아테네 역시 예술이 번성하고 발전해 지중해 전역으로 그 영향력을 퍼뜨리는 데 한몫했죠.

그리스의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묘사해주세요.
아주 잠깐 태양의 따사로운 손길과 가벼운 바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여유. 정지된 시간의 달콤함과 평온함이 떠오릅니다.

‘운 자르뎅 아 시테르’를 통해 그리스 여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정원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

이전 자르뎅 컬렉션과 이번 작품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정원의 색과 구성 요소가 달라요. ‘운 자르뎅 아 시테르’는 녹색이 아닌 푸른색, 흰색, 금색의 정원이죠.

소비자들이 이 향수를 언제, 어떤 감정으로 사용하길 바라나요?
시점과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향기를 통해 개인적이고 고유한 관계가 형성되고, 이로써 자신만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감정이 피어납니다. 핵심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죠.

에르메스 하우스 퍼퓨머로서의 삶을 들여다보죠. 에르메스 브랜드와 향수는 어떤 연관성을 갖나요?
에르메스는 1951년부터 이어진 위대한 조향사들의 유산과 일련의 가치를 물려받아 프랑스 향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혁신을 위해 헤리티지로부터 도출한 자유롭고 대담한 선택을 반영하는 향수를 선보이죠.

에르메스 하우스 조향사로 활동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나요?
에르메스는 사람을 우선시하기에 관대함과 나눔을 중시합니다. 에르메스의 가치가 지닌 본질에 이런 인간성, 자유, 다양성이 있죠. 이런 가치가 저와 팀 직원들의 업무 효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영화로 표현할 때, 어떤 배우가 당신을 연기하면 좋을까요?
멋진 질문이군요! 아마도 케이트 블란쳇? 늘 그녀의 탁월한 감수성과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에 감탄하곤 합니다.

유년 시절에 영감을 준 영화를 공유해줄래요?
영화보다 책에 몰두했어요. 이야기와 전설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좋아하는 색이 있나요?
특별히 선호하는 색은 없습니다. 다만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컬러를 향이나 질감과 연관 짓곤 해요. 이를테면 조각가의 작업 방식을 떠올릴 수 있겠군요. 컬러 팔레트를 놓고 작업하는 화가처럼, 조향사는 향수 구성을 위한 원료 팔레트를 소유하죠.

향을 통해 추구하는 판타지는 무엇인가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유일한 열망이자 본질에 대한 추구죠.

에르메스 퍼퓸의 차별화된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탁월함’에 대한 요구야말로 에르메스 하우스를 위해 일하는 장인과 예술가들의 노하우를 찾고 개발하도록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향수 분야에서 재료 선택은 절대적 엄격함, 기술 개발과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은 모든 창조물의 자양분이며, 어떤 균열 없이 진정한 존재감을 발현하는 세심한 우아함과 세련미로 점철된 스타일의 형성에 기여하죠.

에르메스 퍼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감히 무한하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에르메스는 놀랍도록 풍부한 역사와 창의성으로 이뤄진 하우스입니다. 하우스 내 서로 다른 영역은 풍부한 창의성이 넘쳐흐르며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에르메스 하우스에서는 “디자인에는 기억 상실이 없고 기억이 없는 창조는 없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는 절대적 사실입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에르메스 하우스로부터 무한한 아이디어를 얻으니까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