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장에서 발견한 네 권의 책
낡은 종이에서 길어 올린 벼린 날.
<한국현대시해설> 김현승ㅣ관동출판사, 1974
명랑한 생활은 경박한 생활과는 다르다.
밑줄 긋고 시작하고 싶은 문장 하나. <한국현대시해설>서문 네 번째 문단 첫째 줄. “시란 가장 극단적인 주관의 산물이어서 그것을 해설함에는 해설하는 사람에 따라 의견도 구구할 것이다.” 교과서에 기록돼 낱낱이 파헤쳐지는 시의 주인은 영면에 든 지 오래인데 도리어 그 잠을 깨우는 곡해는 아닐지 심드렁하던 학생이 자라 무려 시 해설집을 집어든 연유는 하나. 극단적인 주관적 산물에 이어진 다음 고해다. “본저의 해설이 반드시 보편 타당성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무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양식과 경험과 감수성을 나로서는 성의를 다하여 이 해설에 기울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경험했다. 저자 김현승이 자신의 시 ‘창’에 붙여놓은 성의 깊은 해설을. 태양의 명랑을 그리며 그것은 경박과는 다르다는 시인이자 해설가의 합치를. 어느 시에서는 언젠가의 독자가 짙게 연필 선을 그어놓은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를. 그는 왜 그 구절을 되새겼을까. 낭독과 독해와 해석과 주관이라는 명랑.
<BRIDGES IN SEOUL>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They Faced The Necessity Of Something To Cross Over The Deep Valley Or River.
“But Soon.” 발췌한 문장 앞머리에 붙어 있던 긴박. 돌을 깎고 불을 피우며 삶을 이었을 원시시대 인간들에게 그런 날은 급작스레 닥쳐왔다. 미지의 땅을 향하는 길, 그것이 탈출이었을지 탐험 본능이었을지 알 도리가 없지만 물 위, 틈과 틈 사이에 놓은 우직한 통나무, 돌같은 원초적 교량 앞에서 다만 주저앉지 않고 걸음을 뗀 인간의 발자국을 가늠해볼 뿐이다. 이 책은 당시 기준 6백 개가 넘는 서울 내 다리 중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짚어볼 만한 다리 1백 개를 추려 그들의 소재와 설계도 등을 낱낱이 분석한 기록집이다. 출간 시기와 발간 주체로 예상해볼 때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완성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데, 그 주제가 왜 하필 다리였는지 명랑한 박력에 터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다. 책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꿈에서만 가능하지만, 다리의 미래 발전은 현재의 관점에서 추정할 수 없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이는 아마 미래를 꿈꾸며 과거를 쌓아온 이들이 이룬 결과일 것이다.
<HOW TO CATCH THE ACTION> KODAK AND TIME-LIFE BOOKS
The Drama Of Movement. Wherever There Is Life, There Is Action.
필름 카메라의 선두주자였으나 디지털카메라 시장으로의 전환을 미뤄 몰락에 가깝게 하락했던 코닥 Kodak이 전성기에 내놓은 무려 “액션을 포착하는 법”. 웃어야 해 말아야 해, 그러거나 말거나 노랗고 빨갛고 예뻐하지 않을 수 없어 펼쳤다가 당했다, 포착. 공을 잡으러 달려가는 강아지. 허공에 펀치를 날리는 고양이. 림 위에 구르는 농구공에 뻗친 눈동자들. 깃털처럼 휜 발레리나의 발등. 산맥 같은 파도에 오른 서퍼.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날아오르듯 달리는 어린이. 노를 젓는 두 팔처럼 단단한 미간의 조정 선수···. 찰나의 숨이 모여 역동을 빚는다. 이제는 필름 카메라도 디지털카메라도 쥘 일 없이 스마트폰 카메라의 빨간 버튼만 누르는 현대인에게 조리개를 여닫고, 셔터 속도를 조절하고, 패닝시키고, 플래시를 활용하라 는 친절한 가이드는 아득하지만(그러나 전문 포토그래퍼가 이르길 여전히 유용한 내용이라고 한다), 순간을 포착하는 기본 자세만큼은 기억에 남기고 싶다. “Being There”, 그곳에 있는 것.
<계간미술> 중앙일보ㅣ1983 겨울
‘전위다, 전위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전위다. 정체가 무엇인지 얼굴을 바짝 들이대게 만드는 평면. 모호한 수법. 그리고 시대를 압도하는 무언. 전위가 아니다. 당대 평론가 측 반응은 오히려 잠잠했고, 일부에서는 아예 무시하거나 평가를 유보했다고 <계간미술>은 기록했다. 곁들여 이는 아마도 그의 그림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의 기량은 인정한다 해도 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 때문이 아닌가 전했다. 서울 미술관에서 연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82년 문제 작가”로도 꼽힌 이 예술가의 행적을 좇아보면 이후로도 그는 생물처럼 변해가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데, 그 구심점은 작가 노트에 남긴 짤막한 토막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나의 그림은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다. 달콤하거나 씁쓸한 맛과 같은 것을 즐기려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척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공격 목표를 향한 무기가 되었으면 할 뿐이다.” 그 이름은 신학철. 전위다, 전위가 아니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기개의 무기를 장착한 오늘의 예술가.